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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한국과 인연이 깊은 발명왕 에디슨

전기자동차 구동원리는 배터리에 저장된 전력으로 모터를 회전시켜 주행하는 것으로 화석연료를 태워 에너지를 얻는 내연기관과 다르다. 따라서 전기차는 일반자동차와 달리 대용량 배터리는 기본이고 여기에 충전기(OBC·On Board Charger) 및 구동 모터, 힘을 제어하는 장비들로 채워져 있다. 특별히 차량에 부착된 충전기(OBC)는 가정 또는 충전소의 교류(A/C)전력을 직류(D/C)로 전환해 베터리로 보내는 필수장비다.   지난 2회에 걸쳐 발명왕 에디슨 이야기를 쓰면서 왜 일론 머스크가 전기차 브랜드를 ‘에디슨’이라 하지 않고 ‘테슬라’로 명명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보면 전기차의 동력은 직류이므로 전기차에 어울리는 사람은 교류의 테슬라가 아닌 직류의 에디슨이 합리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며느리 등 주위의 미국 사람들의 의사를 확인해보니 누구도 에디슨에 대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위인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의 진실성과 사람됨, 윤리적인 흠결을 참고하지 않나 싶다.   사실 토머스 에디슨은 전기자동차 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이력이 있다. 100년도 더 전인 1901년 니켈 철 전지를 개발한 뒤 10년 동안 5만번 이상의 시험을 통해 시속 160km를 달릴 수 있는 꿈의 배터리를 개발하고 이어 3대의 전기차 시제품까지 생산했다. 그러나 1만불이 넘는 배터리 개발비와 영하의 날씨에 작동이 잘 안 되는 등 여러 단점이 있어 대중화되지 못하고 중단되는 아쉬움을 남겼다. 만약 오늘날처럼 가스값이 비싸고 환경문제 등으로 인해 전기차가 시대적 과제였다면 모르긴 해도 그의 전기차 연구와 개발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성공을 거두므로 오늘날 미국 및 세계의 대로는 테슬라가 아닌 에디슨의 전기차가 누비고 다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2012년 11월 말, 필자는 본란에 ‘물불 이야기’라는 제목의 전기 이야기를 게재한 바 있다. 대강의 줄거리는 1883년 고종이 민영식, 황영식 등 대미사절단으로부터 에디슨의 백열등 이야기를 보고받고 경복궁을 전깃불로 밝히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1884년 9월 4일 Edison Electric과 발전설비 및 전기공급을 계약하고 1887년 3월 6일 경복궁을 전깃불로 밝히는 역사가 일어난다. 호롱불 내지 촛불이 고작이었던 조선 아니 세계에 밤만 되면 반딧불도 아닌 출처 불명의 희한한밝은 빛이 대낮 같이 쏟아지니 장안에 입소문이 났고 관람객이 줄을 이었음은 불문가지다. 그런 뒤 사람들이 이것을 ‘물불’이라 하였는데 이는 경복궁의 향원정 연못물을 먹고 불이 뿜어져 나온다고 상상하면서였다. 실제로 에디슨의 전기회사는 3kW 증기 발전기 두 대를 돌리는 냉각수를 향원정을 이용했는데 덕분에 수온이 상승하여 연못의 금붕어가 폐사하는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고 한다. 아무튼 이 사업은 에디슨이 특별히 지명하여 조선에 파송한 기술자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더는 좋은 인연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강원도 강릉에는 여러 볼거리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참소리 축음기 에디슨 박물관’이라고 한다. 에디슨의 생가가 있는 뉴저지 웨스트오렌지와 플로리다 포트메이에 그의 박물관이 있지만 이곳 강릉의 박물관의 유물이 훨씬 값지고 많다고 한다. 무엇보다 에디슨이 발명해낸 전기차 3대 중 한 대가 이곳이 전시되고 있다고 하니 놀랍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발명왕 에디슨 발명왕 에디슨 축음기 에디슨 전기차 브랜드

2023-03-31

[살며 생각하며] 사업가 토머스 에디슨

어릴 적 초등학교에서 배운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1847~1931)은 뛰어난 창의력, 불굴의 의지, 착한 심성을 지닌 천재 과학자의 면모다. 학교 교육이라고는 3개월에 불과했지만 축음기, 영사기, 장거리 전화기, 백열전구, 말하는 인형에 이어 전기자동차까지 무려 1093개를 발명, “천재는 1%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그의 어록이 전혀 허풍스럽지 않음을 나타내 보인 위인이기도 하다.   며칠 전 우연히 tvN의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에디슨에 대한 이런 인식에 적잖은 착오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설마 하며 여러 자료를 확인해보니 TV 내용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어떤 자료는 에디슨의 발명품 가운데 상당수가 순수한 창작품이 아니라 있던 것을 개선, 개량시키거나 편리함과 상용화를 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있었다. 물론 발명에 생애를 걸었던 그를 존경하고 감사함이 후대의 도리이지 성자 같은 인성까지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알고 평가함 또한 옳지 않을까?   “산업과 상업에서 누구나 남의 것을 훔치기 마련이다. 나 자신도 많은 것을 훔치면서 살았다. 하지만 난 어떻게 훔치면 좋은지 그 방법을 알고 있지만 남들은 그 방법을 모른다.” 발명왕 에디슨이 남긴 많은 어록 중 하나다. 1879년 32살의 나이에 그가 발명한 백열등 600여개로 깜깜했던 뉴욕 시내를 대낮처럼 밝힌 성공 이벤트 후 감격 가운데 나온 황당한 자기 고백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디슨의 백열전구는 그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1835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린지가 먼저 만들었으나 돈이 없어 특허 등록을 하지 못하자 1875년 영국의 화학자 윌슨 스완이 특허를 신청해 소유권자가 되었다. 그런 뒤 에디슨이 이 기술을 슬쩍하여 상품화한 뒤 스완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고소까지 했다. 물론 전체를 베끼지는 않았다. 진공처리라는 추가 아이디어로 백열등을 상용화시킨 사람은 에디슨이다.   그러나 ‘어떻게 훔치면 좋은지를 알고’ 원천기술을 무시하고 자기 것이라 한다면 자신의 그 많은 발명품도 색이 바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미국민이 생각하는 발명왕 에디슨의 위상은 한국이나 일본에 훨씬 못 미친다. 좋은 예가 뉴저지 에디슨, 멘로팍에 위치한 ‘그를 기림하는전구탑’은 거의 찾는 사람이 없어 잡초만 무성한 채 방치되고 있다.   에디슨을 말할 때 포함해야 할 세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당대의 투자가이자 야망의 금융가인 JP 모건이고 다른 두 사람은 같은 전기사업을 두고 이전투구를 벌였던 웨스팅하우스와 니콜라 테슬라다.   22살의 나이에 뉴욕에 입성, 주식시세를 실시간 전송케 하는 ‘스톡 티커’를 발명 일약 스타덤에 오른 에디슨이 월가의 상징 같았던 모건을 만나 동업함은 놀랄 일이 아니다. 문제는 교류(A/C)전기의 아버지로 불리는 웨스팅하우스와 니콜라 테슬라다. 에디슨 입장에서 두 사람은 승승장구했던 자신의 직류(D/C)사업에 걸림돌 격이었다. JP 모건과 손잡고 100여개의 직류(D/C)발전소를 맨해튼에 건설한 뒤 천하 통일의 꿈을 펼치려던 그에게 교류(A/C)의 아버지들은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D/C, A/C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업의 성패만 중요했다. 착한 심성의 에디슨이 돈 앞에 어떻게 돌변했는지 다음 회에다루고자 한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사업가 토머스 발명왕 에디슨 사업가 토머스 뉴저지 에디슨

202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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